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1/n 정신 - 김성섭

간단히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리동네 나무그늘 협동조합 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전이사장이었구요. 협동조합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협동조합을 좋아합니다. 다중지성에 대한 믿음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협동조합에서 1/n 정신을 구현하고 싶습니다."

나무그늘 협동조합 좀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이제 7년 정도 됐습니다. 처음부터 협동조합으로 시작했는데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 후에 등록을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5년 된 협동조합입니다. 출발은 민주노동당과 관련이 깊습니다. 지역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진보정당에서 지역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거 때 표를 달라고 하는 대상으로만 사고했죠. 구체적으로 지역에 밀착해서 의제를 발굴하고 주민들과 호흡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는 고민 차원에서 협동조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 도서관이나 민중의 집 같은 형식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주민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려고 까페를 구상했습니다. 들어오는 사람 입장에서 좀 더 당당하고 공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서비스, 교육, 계몽의 공간이 아니라 수평적 입장에서 서로 교류하는 공간을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되살림 가게를 병행했어요. 까페만으로는 부족해서 물물교환 형식을 빌어 비자본주의적인 관계망이 확대되기를 바랬던거죠. 초반에는 성과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주민 사이 관계망도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되살림 가게는 2년 정도 하다가 그만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물량이 줄어들고 교환가치도 떨어지더라구요. 대신 그 문제의식은 희망시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무튼 초반에는 생활상담센터, 희망트럭 같은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희망트럭은 저도 써봤어요. 친구가 이사갈 때 빌렸었죠.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호평도 받고. 그런데 용달업 하시는 분들에게 항의를 받았어요. 저희만 운영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게 롤모델이 되어 여기저기서 트럭을 대여해주기 시작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홈페이지에서는 내리고 조합원만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까페는 상황이 어땠나요?

“까페는 늘 적자였지만 꾸역꾸역 운영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한건데 진보정당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람들도 대부분 당적을 놨습니다. 그러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마을만들기 사업이 시작되면서 저희도 주체로 나서게 되었죠. 소금꽃마을네트워크라는 주민관계망도 만들었습니다. 이미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단체를 엮었고 축제를 함께 하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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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활동지역을 마포로 정했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공동육아를 위한 어린이집에서 시작했습니다. 94년도인가 그랬는데 처음에는 연남동에서 있었어요. 당시엔 어린이집이 생소한 개념이어서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았죠. 부모들이 직접 모여 함께 육아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로 시작했습니다. 저도 껴볼라고 했는데 대기자가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대기자들끼리 2호를 내보자 해서 95년도에 서교동에 또 다른 어린이집을 개원했죠. 저는 예전에는 목동에 살았어요. 아파트 밀집 지역이라 별로였죠. 아이들이 흙도 만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어린이집도 여러 차례 밀려났습니다. 그러다 공교롭게 두 집이 모두 성미산 마을 쪽으로 밀려온 거죠.”

아 그게 성미산마을 공동체의 시작인가요?

“서울시가 2000년에 성미산을 깎고 배수관을 묻는 공사를 하겠다고 했어요. 공사계획은 30년 전에 작성된 것이고 배수사정은 이미 많이 개선되었는데도 관행으로 공사를 강행하려 했죠. 무엇이 더 중요한가 토론을 했고 공사를 막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싸웠죠. 어린이집에서 시작했지만 성미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성미산마을이란 관념이 생겨났어요. 잘 싸워서 백지화를 시켰죠. 처음부터 마을운동 하겠다고 모인 건 아닙니다. 때마침 싸움이 있었고 이제 막 지역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서로 만난 거죠. 당시에 ‘변혁적 지역활동론’이란 팜플렛도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각자 의제를 가지고 변화를 모색하지만 기성 정치권력은 지역으로부터 표를 얻고 권력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결국 지역이 바뀌어야 권력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게 2000년 전후의 사정이었습니다.”

다시 비슷한 질문인데 그 지역이 마포였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당시 마포에 출판사랑 인쇄소가 많았습니다. 인쇄소는 상암동 등지에 많았죠. 보통 인쇄소하면 충무로를 떠올리는데 거기는 주로 선전물 출판을 많이 하구요 출판용 인쇄소는 덩치가 훨씬 커야 하는데 예전에는 지대가 싸니 마포에 많았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단체도 조금씩 늘어났죠. 그러다 결정적으로 홍대가 뜨기 시작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당산철교 보수공사로 지하철 2호선 합정-당산 구간이 끊어진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로 안전문제가 부각되면서 당산철교도 전면 재시공하게 되었죠. 홍대입구와 합정이 2호선 종착지가 된 셈이었죠. 원래부터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찾았으나 대중적으로는 아직 한산한 편이던 홍대 일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어요. 이대-신촌을 찾던 사람들이 점점 홍대로 몰려왔죠. 그러면서 동시에 마포의 색깔도 다양해졌어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면서 새로운 실험을 해보자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주민들도 호응했구요. 공동육아를 넘어 지역을 바라보게 됐어요. 방과후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운영해보기도 하고 먹거리 문제로 생협도 고민했죠. 삶에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를 지역에서 함께 해결해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유기농 아이스크림 가게도 해보고 반찬가게도 내보고 도시형 대안학교도 만들어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는 경험을 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성미산마을이란 이름도 많이 알려졌고 이 관계망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평가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관점에 따라 제각각이겠죠.”

그런데 나무그늘 지금 위치(염리동)로 오게 된 이유는 뭔가요?

“지역활동은 자연스럽게 주민과 함께하는 생활정치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어요. 성미산마을에서는 협동력과 자발성을 배웠고 민중의집에서는 진보적 자원을 지역으로 어떻게 모으는가 배웠어요. 앞서 말했듯 평가는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너지가 주변으로 흘러넘쳐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가 그 공동체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로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는데 마포를 벗어나기는 어렵고 해서 마포 안에서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있고 아파트가 많지 않은 곳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염리동을 찾게 됐죠. 이제는 염리동도 아파트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밀려났죠. 그래서 결국 자산화라는 고민까지 왔습니다. 홍우주와도 만나게 된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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